그러니깐 오늘은 종일 그닥 좋이 않은 말로 ‘쇼부’라는 것을 쳤단말야. 다음 주 군생활의 꽃이라 하는 유격이니 내일 복귀하지 않고, 다음 주까지 일하다 복귀하면 안되겠습니까. 저야 발목 때문에 유격행군도 안하고, 가서도 종일 열외나 할것이니 별 상관 없다만, 데리고 온 저 부사수, 내년에도 유격을 뛰어야하는 저 부사수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. 이런 식으로 우리를 그간 맘껏 부려먹은 간부에게 은근히 요구를 했단말야. 역시나 그 간부는 쿨한척엔 일가견이 있어서, 걱정마라 다음주 화요일쯤 복귀하면 되냐? 라고 했었지. 아니 화요일이 뭐야 다음 주 내내 이곳에서 있다가 무사 복귀를 하게 생겨서 얼씨구나. 파견 온 보람이 있구나 하며 작업을 마친후 부대 전화를 했었어. 전화를 받은 동기 왈. 유격 2주 뒤로 미뤄졌어. 우리 중대만. 좋다 말았지.
파견.
나와 부사수는 꽤나 고급인력이라고 해 두자 5톤 트럭을 끌고 온 손님이니. 말이 5톤이지 살벌한 소릴 내며 휙하니 지나가는 15톤 덤프트럭과 충돌하면 그 트럭은 아작날거야 아마. 공룡 같은 강철을 두른 군용차니. 신기하게도 이런 살벌한 산속에서 몇 주간 작업을 했는데도 차가 고장 나지 않았지. 대충 그간의 작업은 빠르면 내일. 아니면 다음 주 중에 끝날 것 같아. 이제 굴삭기나 트럭은 제 할 일 다 했으니, 속된말로 ‘빠시’들이 남은 일을 언제 다 끝내는가에 달렸지. 그래서 오늘은 차 몇 번 안 움직이고 책을 한권 읽었어. 주제 사라마구 할배의 ‘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’ 지루하고 어렵더구만. 그래도 곱씹어 보자면. 삶과 죽음에 대한 할배의 끝없는 사색을 엿볼 수 있었지. 그 할배 책들이 다 그 할배의 사색을 고대로 드러내고 있잖아. 문체나 내용이나. 하지만 내일도 차에 누워서 더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. 어쩌면 오래도록, 죽기 전까지.
역시나 일년 중 시월의 하늘이 가장 예쁜 것 같아. 나중에 하늘을 좋아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. 지금 있는 곳은 양주지만. 계속해서 살고 있던 양평의 하늘은 뭔가 달라. 나중에 다시 그곳에 들른다면 하늘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고 벌써부터 확신하고 있지. 아~ 나는야 이시대의 마지막(?) 자연주의자인데(훗), 몇 주 동안 한 작업이 산을 깎는 그런 일이었지. 핑크색과 더불어 보라색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. 하지만 보랏빛 들국화는 얼마나 이쁘던지. 그걸 다 해쳤지. 공익을 위한 명령이라는데, 나 같은 일개 병사가 어쩔 수 있나.
벌써 수능이 한 달 정도 밖에 남질 않았다. 동생의 수능에 맞춰 휴가를 나갈까 해. 응원하고 시험 치르고나면 놀아줘야지. 나도 좀 쉬고.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, 우드스탁에도 오랜만에 들려볼까 해. 참.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만화책만 100여권 빌려서 한이틀 방안에서 과자나 씹으며 푹 썩고 싶어. 부대에 없는 컴퓨터를 이곳에선 할 수 있으니 인터넷으로 원피스를 보는데. 무슨 만화가 그렇게 감동적일 수 있냐. 모니터 붙잡고 울뻔했지. 참. 참... 죽여줘...
요즘 너무 외롭다. 사람들이 주위에 많으면 뭐하나. 사람 사귀는 게 이렇게나 힘든데.
아직 100일 이상이나 남았지만, 벌써부터 생각하는데, 이곳에 와서 참 많은걸 배워가겠구나 싶다.
